Books2010.06.16 13:07

블랙스완 - 극단의 세계에 살고 있는 회의주의자의 기막힌 논리


꽤나 심오하고 어려운 책이었지만, 되도록 짧게 책과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이 한 줄은 글을 다 쓴 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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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The Black Swan 을 읽었다. 

귀납법의 약점을 파고들다
블랙 스완 - 즉, 검은 백조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이다. 저자는 흰색 백조만 보아온 유럽인들이 검은 백조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검은 백조도 있었다! 라는 하나의 사례를 들어서, 귀납법의 약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는 추수 감사절에 주인에게 잡아먹히는 칠면조 이야기였다. 어떤 칠면조가 1000일 동안 주인에게 먹이를 얻어 먹었다고 해도, 1001일째 되는 날에도 주인이 밥을 준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살인범에게서 증거를 하나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비록 현실에서는 그렇게 결론내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대다수의 경우 귀납법의 취약점에 노출되어 있다. 저자는 이러한 세계관을 '플라톤적 세계관' 이라고 부르며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비판하고 있다.

가우스의 세계와 극단의 세계
저자가 비판하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가우스적 세계관, 즉 평균의 세계관, 정규분포곡선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극단적인 경우를 무시하는데, 저자의 주장은 현실 세계에서는 이러한 극단의 사건, 극단의 인물들이 세계를 드라마틱하게 바꾸는 경우가 많기 떄문에 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20대 80  법칙이라고 불리우는 파레토 법칙보다도 더 극단적으로 1대 90과 같은 형태가 우리 주변을 지배한다는 것. 1%의 부자, 1%의 논문, 1%의 작가, 1%의 주식시장에서의 사건 등등이 전체에 대한 파급효과를 어마어마하게 갖고 있는데, 가우스적 세계관 (=정규분포의 세계관 = 평균의 세계관) 은 이러한 부분을 '확률적'으로 너무 trivial 하다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

여기까지가 내가 이해한 이 책의 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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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나를 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 자신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해서 보다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책 읽기라는 과정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너무 감상적이었나??)

내가 지금까지 책을 읽으면서, '아.. 세상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구나... 그것도 지구 정 반대편에 혹은 나보다 몇십년 몇백년을 앞서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몇번인가 있었다. 마치 어릴적 잃어버린 형제를 찾은 느낌이었달까? 세상을 살면서 외롭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 + 정신적 영감을 느끼게 해 주었던 사람들은 버틀란드 러셀 , 리차드 도킨스, (약간은) 말콤 그래드웰이나 세스 고딘 같은 사람이었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그들보다 더 나에게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상시 나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경험적 회의주의자' 라고 내릴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유신론자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의 논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알 수 있다'와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라는 관점의 차이에 가까웠다. 이런 의미에서 예전에 읽었던 '생각의 지도' (http://www.yes24.com/24/goods/1379588?scode=032&srank=1) 라는 책에서 동서양인의 우주관의 차이에 유사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헷갈렸던 부분은 나는 이렇게 까칠하게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도 때때로 그렇지 않은 면이 많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행동을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일지도 모르지만, 나 스스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나에 대해서 혼란스러운 점이 꽤 많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나 자신의 '경험적 회의주의' 라는 것이 - 비록 내가 이 말을 과거에 들어봤을지라도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말이지만 - 나의 많은 행동들을 설명해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경험적 회의주의자들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책의 일부내용 중에서 나의 이런 느낌을 trigger 했던 부분들로 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사람들은 흔히 나 같은 회의주의자, 경험주의자들이 일상생활에서도 꼬장꼬장하고 편집증적이고 베베 꼬여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는 오히려 그 반대임을 보여준다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그렇다). 내가 어울리는 여느 회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흄은 명랑한 식도락가였고 문명을 떨치고 싶어했으며 살롱 문화나 유쾌한 수다를 즐겼다....(중략).... 

흄은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급진적인 회의주의자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그런 태도를 벗어던졌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 입장은 반대다. 나는 일상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에서 회의주의자다. 말하자면 내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어떻게 하면 칠면조 꼴이 되지 않도록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주변 사람들은 내게 "탈레브 씨, 도로를 건너는 것처럼 위험천만한게 없는데, 어떻게 길을 건너십니까?" 하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더 바보 같은 질문도 들었다. "그러니까 어떤 위험도 감수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당연하지만, 나는 위험 공포증을 퍼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눈을 감은 채 길을 건너지는 말라는 것이다.

(전략)... 그는 파리에서 나와 같이 공부한 소설가 지망생 장 올리비에 테데스코로, 내가 지하철을 뛰어서 타려고 하자 이렇게 만류했다. "나는 기차를 타겠다고 뛰지는 않아" 운명을 무시하라. 그 이후 나는 시간표에 맞춰 살겠다고 달음박질하지 않으려 애썼다. 테데스코의 충고는 사소한 것이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서 나는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고, 자기의 시간표와 시간, 자기 인생의 주인됨의 의미를 느길 수 있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쫓아가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남들의 생각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할 수만 있다면, 경쟁의 질서 바깥이 아니라 그 위에 서도록 하라. 고액연봉이 보장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 돈보다 많은 것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운명에 욕설을 퍼부을 수 있는 스토아주의자가 되는 첫걸음이다. 인생의 기준점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면 이미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음식이 형편없거나 커피가 식었거나 퉁명스런 반응을 얻거나 불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면 하루를 망쳤다고 화를 내기 일쑤다. 나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럽다. (중략)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행운이며 희귀 사건이며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의 사건이다. 

























 






 
Posted by lucky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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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yunseob

    생각의지도라는 책은 예전에 우리가 독서모임할 때 읽었던 것 같네. ㅎㅎ

    2010.06.29 03:2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